글.정해욱 미드데이 공동 대표 · <가상-건축> 대표 편저자
<글 싣는 순서>
①생각과 형태 사이의 긴장에 관하여 – 렘콜하스에 대한 단상
② 경이로운 건축적 성취가 지나간 자리 – 페터 춤토르를 좋아하시나요?
③ 건축가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 발레리오 올지아티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발레리오 올지아티(Valerio Olgiati). 이 화제의 스위스 건축가는 어쩌면 대중들에게는 전혀 유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에 건물을 지은 적이 한 번도 없고, 대중들에게 알려질 법한 정도로 떠들썩한 유명세를 가진 건물을 만든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건축인들 사이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건축계 안에서도 최근 몇 년간 참 많이 언급된 건축가다. 그의 건축관을 담은 단행본 ‘Non-referencial Architecture’는 지난해 국내에 ‘비참조적 건축’으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으며, 이 책 또한 건축인들 사이에서 소소한 화제를 모았다.
요즘 들어 이 건축가는 더욱 화제다. 얼마 전 새로 창간된 한 건축 잡지는 창간호부터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가 던진 화두인 ‘비참조성’을 비평적 주제로 호출하기도 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 여기엔 어떤 곱씹어볼 만한 점들이 있을까. 이 부분을 조금 더 넓은 독자층에도 전달되면 좋지 않을까 싶어 이번 글은 스위스 건축가 발레리오 올지아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올지아티가 설계한 건물은 개성이 아주 강하다. 그 특징을 거칠게 요약하면 강렬한 원시성이다. 형태적으로 강렬한데, 그것이 유려한 형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단순하고 직관적인 형태에서 비롯된다. 직관적이면서 원시적인 감각이 오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그의 건축물은 주로 붉은 콘크리트로 강렬한 날 것의 느낌을 내며, 시각적으로 아주 크고 두껍고 단단하다. 그는 낯설면서도 극히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거대하게 하나만 두거나 아니면 수차례 반복하는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움은 마치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문명의 조형 같기도 한 것이 때론 주술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반대로 동시대 건축이 자랑하는 현란한 테크놀로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건물은 엄격한 질서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형태가 고전적이지 않아서, 건축물의 인상은 그리스의 신전보다는 잉카문명의 신전에 가깝다. 건축가 본인도 자신의 책 ‘비참조적 건축’에서 멕시코의 자포텍 신전을 참조 사례로 들었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건축물은 최첨단 21세기에 맞서 오히려 가장 생경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특징은 단순히 건축물의 외부에 드러난 요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평면도 그러하다. 그가 설계한 스위스 바젤의 ‘Baloise Insurance Company Office Tower’의 평면이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집의 픽토그램을 형상화한 듯한 삼각 지붕을 갖는 기다란 형태 요소가 파사드를 뒤덮고 있지만, 평면에도 똑같은 모양이 누워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평면의 형상이 건물의 기능에 더 도움이 되거나 공간 활용에 더욱 효율적일까? 당연히 아니다. 이것은 기능과 효율을 일정 부분 양보하고서라도 지켜낸 질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이 형태가 갖는 ‘집’이라는 기호는 평면이라는 그림에서만 눈에 보일 뿐, 실제 공간을 사용할 때는 붙잡히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건물은 더욱 주술적으로 느껴진다. 건물 안에 미신을 심어놓은 것 같다. 사실, 건축에서 평면은 건물의 기능과 별개로 건물에 주입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평면 자체가 하나의 추상화이거나 다이어그램인 경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면 자체가 주술적 낙서 같아 보이는 것은 정말 흔치 않다.
건축인들은 왜 여기에 열광했을까. 상상해 보면, 많은 건축인들은 현대성을 거스르는 듯한 시각적 새로움에 자극을 받은 것 같다. 너무 많이 발전된 나머지 쫓아가기에 너무나도 피곤한 이 시대에서, 압도하는 시스템(자본, 기술, 법규 등)에 짓눌리는 동시대인에게 강렬한 원시성이 해방감을 선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특히 고대로부터 이어진 듯한 감각은 건물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으로부터 휘말리지 않은 채 영속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많은 스위스 건축가가 이러한 특징을 공유하지만, 올지아티의 건축 형태는 유독 그 사이에서 더욱 원시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때론 힙하다. 이 시대에 실종된 감각을 보여주는 것 같은 통쾌함이 있어서 그런 듯하다. 그의 건축물에는 도대체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알 수 없는 자국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환호한 건축인들의 심리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중년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심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올지아티의 디자인은 분명 강인한 건축가의 판타지를 생성하며 나약한 동시대인에게 대리만족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올지아티는 자신의 작업을 ‘비참조적’이라고 설명한다(정확히는 영어로 Non-referencial, 이것은 어쩌면 ‘비지시적’으로 번역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이 개념어는 그 정의가 불분명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비참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기 전에, 그의 건축 작품이 갖는 형태적 특성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이미지로 먼저 세상에 퍼져나갔고, 한국에도 그렇게 먼저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올지아티는 그 이후에 비참조 등의 여러 가지 수사를 동원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창작자는 자신이 창작한 결과물에 잠재한 힘을 스스로 다 모를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야구장에서 사랑받는 수많은 응원가들이 그런 목적으로 쓰일 거라 상상도 못 한 채로 작곡되었던 것을 상기하자. 원래 창작물이란 것이 그렇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은 그의 건축물이 갖는 특징적 형태에 관한 독립적인 독해다.
그럼에도 그의 디자인이 만든 원시적 형태들은, 그가 던진 말 ‘비참조’와 퍽 잘 어울린다. 아주 찰떡이다. ‘비참조’라는 말 자체가, 서구 문명이 축적되면서 굳어진 고도화된 참조 세계에서 벗어나 인류의 순수한 감각을 회복하는 듯한 초월적 메시지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가 책 속에서 비참조적 건축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설파하는 내용이 다소 거칠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큰 틀에서 어딘가 그럴싸하게 개념어와 조형적 결과물을 잘 엮은 것은 인정받을 만한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개념어의 전제로서, ‘비참조적 세계’를 진단하는 책의 앞 부분은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들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과 비참조성의 상관관계, 혹은 비참조성의 의미에 관한 논쟁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떡밥을 성공적으로 던졌다. 물론 이 느슨한 연결고리 사이에는 올지아티가 자신의 작업과 자신의 야망을 옹호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만든 논리가 곳곳에 함정처럼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의외로 한국 건축에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작가성과 아이디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부분이다. 만약 어떤 건물이 단순한 시설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 작품이 되려면, 동시에 단순한 설계자가 아니라 작가-건축가가 되려면 무엇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일까.
올지아티는 이에 대한 답으로 (건축적) 아이디어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유효한 아이디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그가 내린 정의에 대해 모두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그가 유효한 건축적 아이디어에 포함되지 않는 사례를 드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건축가들이 아이디어라고 내어놓는 것들 대부분이 수준 미달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건축가는 자신에게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지만 보통 그 아이디어는 건축물의 프로그램이나 형태에 대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발레리오 올지아티, 저서 ‘비참조적 건축’ 중에서
대부분의 실무에서 ‘아이디어’라고 칭하는 것, 소위 번뜩이는 ‘콘셉트’로 불리는 것들은 올지아티의 입장에서는 낮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표면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건축에서 아이디어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 아이디어란 쓸모나 질서 등을 넘어서 건축물을 성립하게 하고 존재(가치)를 붙잡아주는 독립적인 당위다. 좋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의 디테일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좋은 아이디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아이디어가 담긴 건물이 드물어, 작가성을 제대로 주창해 낼 수 있는 건축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설계 공모를 포함한 건축 공론의 장에서 아이디어가 중심이 되어 논의가 진행되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건축가들의 작업 설명 또한 개인의 서사 아니면 건물 지음에서의 고난을 전시하는 이야기들만 주를 이룬다. 아이디어는 분명 한국의 건축 문화에서 실종되어 있는 감각이다.
그래서 올지아티의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아이디어에 대한 묘사는 아이디어가 어떤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쉽게 설명해 주는 단비와 같다. 물론, 그가 내린 정의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비슷한 차원에서 함께 고민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올지아티는 아이디어의 신봉자다. 그 바탕에는 작가-건축가를 향한 노골적인 열망이 있다. 이 열망은 그의 모든 논리를 선행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였든 그 논리 전개의 끝은 사실 답정너다. 그래서 책에서 느껴지는 일부 작위적 전개는 오히려 어쩌면 작가-건축가의 성립 기반이 거의 무너져버린 시대에 맞서 어떻게든 유효한 작가-건축가를 성립시키고 싶은 그의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책에서 모순이 많이 등장할수록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건축에서 ‘Authorship(책에서는 작가성으로 의역됨)’은 여전히 성립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시대의 건물은 건축가에게 작가성의 영역을 허락해 주는가. 건축가는 작가일까. 작가라면 도대체 어떤 작가일까….
이러한 답 없는 질문들이 바로 그가 몸소 남긴 진짜 교훈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한 채, 그저 건물이 멋지거나 흥미롭기만 하면 일단 설계자를 작가로 포장하여 이해하려 들기에 바쁘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올지아티의 건축은 아주 우연하게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한국에서 바로 작가성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일부 국내 건축물이 올지아티의 건축물과 시각적 유사성을 지닌다는 의혹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붉어졌던 사건이다. 이것은 올지아티의 건축 철학과는 별개로, 아이디어가 다르더라도 시각적 결과물이 유사하다면 이것을 얼마만큼 문제 삼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작가성에 관한 또 다른 논쟁적 주제다.
독자적인 건물 생김새는 작가-건축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건 덕분에 올지아티는 그렇게까지 저명한 건축가까지는 아님에도 국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가 던진 말 ‘비참조’의 모호성은 모든 것을 뒤섞으며 담론적 토의가 필요한 주제에까지 이르게 된다. 올지아티는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얻어걸린 것일까. 어쨌든 이것은 올지아티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